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 크래프트 맥주를 접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습니다. 대부분의 핫한 브루어리들이 서울에 몰려 있으며, 제주의 제주맥주/맥파이, 부산의 와일드웨이브/고릴라브루잉/벤스하버 정도만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을 뿐이죠. 바틀샵 쪽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맥주잡지 트랜스포터의 바틀샵 지도만 보아도 바틀샵의 수도권 편중 현상을 쉽게 알 수 있지요.
특히 청주는 크래프트 맥주의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구 13위의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일 정도로 크래프트 맥주를 접할 통로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크래프트 맥주를 알리려 노력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홀리데이펍(&브루어리)입니다.
홀리데이펍에 들어서자마자 ‘정말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펍 곳곳엔 신상 맥주 포스터가 붙어 있었으며, 가게 한편엔 단골들이 쉐어링을 진행한 후 병을 진열해 놓은 곳도 있었죠. (드리 폰타이넌, 쓰리 선즈, 옴니폴로, 파운더스 등등 가히 근본과 신예가 어우러진 라인업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냉장고는 맥주를 테이크아웃할 수 있는 쇼케이스 냉장고입니다. 최근 맥덕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크래머리 스무디 IPA도 진열되어 있어 꽤나 놀랐어요.
쇼케이스 냉장고를 뒤로 하고 제일 먼저 십선비 ESB를 주문했습니다. 십선비 ESB는 홀리데이펍에서 타 브루어리와의 컬레버레이션으로 양조한 시그니처 맥주입니다. 청주가 선비의 도시라 불리는 만큼 ‘열 명의 선비들이 양조했다’는 뜻을 담았다고 하네요. 사실 ESB(엑스트라 스트롱 비터)란 장르는 처음 접해보는 만큼 과연 어떨까 막연한 걱정이 있었는데, 한 모금 마시자마자 그런 걱정이 싹 날아갔습니다. 강한 홉의 쓴맛과 함께 고소한 몰티함이 제일 먼저 느껴졌고, 저 두 캐릭터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도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전반적으로 균형 잡힌 맛이었습니다. 대충 서부식 DIPA와 비슷한 맛이 아닐까 예상했는데 훨씬 더 묵직하게 다가와 놀랐어요. 언탭에 등록되어 있었다면 좋은 점수를 주었을 텐데 아쉽네요!
아직은 청주에서만 마실 수 있지만, 곧 K모 브루어리와 콜라보한 캔 제품도 출시하실 예정이라고 하니 다들 한 번쯤 맛보시길 추천합니다.
다음 잔으로는 아까 쇼케이스 냉장고에서 점찍어 놓았던 크래머리 스무디 IPA를 마셨습니다. 워낙 해외에서 핫한 장르기도 하고 캔 유통은 국내 최초기 때문에 출시 예고가 나왔을 때부터 많이 기대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약간 아쉬웠습니다 ㅠㅠ 패션후르츠라는 치트키 부재료를 필두로 뒤를 받쳐 주는 망고/파인애플이 인상적이었고 맛도 충분히 트로피컬&새콤달콤했지만 스무디 IPA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질감이 너무 묽다고 해야 할까요? 차라리 스무디 IPA가 아니라 사워 IPA라 홍보했다면 더 만족스럽게 마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더라구요.
스무디 맥주는 보통 베이스가 되는 맥주를 양조한 후 과일 퓨레나 과육을 추가함으로써 완성됩니다. 그 결과 단순히 과일 맛만 나는 것이 아니라 스무디라는 이름에 걸맞는 묵직하고 thick한 질감을 갖추게 되는 것이지요. (벤스하버에서만 온탭되었던 컬러드x크래머리 스무디나 더 베일, 모탈리스 같은 해외 브루어리들의 스무디 맥주에서도 그러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 국내법상 과육이 전체 맥주의 20% 이상을 차지하면 유통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질감을 포기한다는 선택을 내렸다고 합니다.
설명을 위해 가장 최근 마신 스무디 스타일 맥주(더 베일x옴니폴로 바닐라 오렌지 테프넛)의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질감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물론 크래머리 스무디 IPA도 일반 맥주에 비해서 탁한 편이긴 하지만 더 베일의 맥주에 비해선 부족하고, 이 차이는 입을 댔을 때 더욱 크게 다가왔어요. 다만 이 질감 문제만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면, 그래서 온전히 과육을 살린 스무디 IPA를 내놓을 수 있다면 해외 브루어리의 스무디와도 비교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해도 드링크 로컬을 실천하며 응원해야겠지요!
-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크래프트브로스 원더 페일에일의 초기 캔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 ‘real recognize real’이란 말을 아시나요? 홀리데이펍 사장님과 맥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든 생각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사장님이 정말 맥주를 사랑하신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맥주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전지적 맥덕 시점의 대화를 원없이 나눌 수 있고, 크래프트 맥주가 처음인 분들은 넓디넓은 맥주의 세계에 빠질 수 있으리라 장담합니다! 저는 다음에 크래프트 맥주 클래스나 맥주 쉐어링에도 참가해볼 생각입니다 ㅎㅎ
이번 주말엔 항상 먹던 카스/테라 대신 홀리데이펍에서 크래프트 맥주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